나는 그림을, 더 자세히는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미술학원에 등록하게 된 예체능계열 학생이었고, 수순 대로 미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도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툴을 배웠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입시미술 학원에서 1, 2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했고, 서양화과 수업과 영화제작 수업을 들었다. 외국 디자인 서적에 나오는 모던한 포스터들, 인쇄광고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3학년 때, 역시나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벼락치기를 할 때 쯤이었던 것 같다. 취업은 전략이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던 것 같다. 난데없이 영어공부, 공모전, 각종 인턴 (디자인 에이전시가 아닌 일반 기업에서) 등을 하며 난 참 열심히 하고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좋은 디자인에 대해 기업이 선택해준 시안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고, 디자인 마케팅이라는 용어가 선전 문구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경영학을, 마케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케팅을 공부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 듯 신이 났고, 케이스스터디를 하다보면 소위 간지나는 기발한 전략과 그에 따른 광고, 또 그에 따른 디자인 적용 사례를 보다보니 공부 그 자체로서 큰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첫 직장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보수기업의 계열사로, 업종 중에서도 꽤나 보수적이라는 증권회사였다. 게다가 디자이너도 아닌 증권영업사원도 아닌 묘한 행정직(?)이었다. 별 보고 나가 별 보고 들어오고, 사내의 온갖 정치적 상황과 그 여파에 시달렸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나는 감사, 시험, 대표이사의 돌출행동에 치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예술하고 싶다."
그제서야 나는 디자인도 마케팅도 아닌 예술이 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이란 거창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마케팅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아도, 세상에 꼭 필요한 것. 혹은 제품. 혹은 활동. 또 아무런 이유없이 예쁘거나 독특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넣게 되는 그런 무언가. 그걸 나는 내가 하고픈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온갖 마케팅 근거와 뱃사공들과 정치세력들이 디자인에 참여하다보니 살이 마구 발려 남겨진 생선 대가리와 뻐 마냥, 우리나라에서의 디자인은 참으로 독특한 상황에 놓인 아주 재미없는 차가운 덩어리가 되곤 한다. 마치 PC에 깔린 엑셀로 견적서를 만들다 보면 이 사람 저 사람들이 한마디 씩 하고 가는 것 같은 형국이다. 일본의 콘솔 게임, 브라질 음악, 프랑스 감독들이 거대 자본의 힘으로 만든 영화들, 독일의 출판사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내는 책들, 이 모든 것들은 분명히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상품들인데도 그들이 내놓는 것들은 제조품이 아닌 창작물의 냄새가 난다. 모두가 자본주의라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만 이상한 연료가 유통되기라도 하는 걸까. 하라켄야의 말처럼 디자이너의 능력보다 시장의 질이 문제일까. 우리나라가 성장을 너무 빨리 한 탓에 정신적인 여유를 가질 만한 정서가 부족한 걸까.
흔히 된장녀라는 단어는 비난받는다. 하지만 난 좋다. 나 또한 된장남이라는 인식이 박힌 채 주위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는 것이 좋다. 미래를 위해선 언제나 오늘은 참으라고 간단히 말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앞일에 대해 너무 고민하다가 검증된 길을 한참 걸어간 뒤에 나중에 느끼는 후회와, 내 심장속에서 꽃히는 방향을 한참 가다가 나중에야 현실에 치여 느끼는 후회가 있다고 쳐보자. 나는 후자 쪽에 더 끌린다. 이 모든 것은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다.
난 절충할 수 있다. 충분히 절충하며 유도리 있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후회는 지금 나에게 있어 극단의 선택이 아니며, 그런 고민을 할 단계도 아니다. 지금 나에겐 비지니스와 예술을 둘 다 해야만 하는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만이 있을 뿐이다. 먹고 살자면 일은 해야겠다. 왜 나도 대학 나왔는데 집을 사지 말아야 하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지 말아야 하겠는가. 또 나에게 열정이 남아 있는데 재미도 없는 일만 하다가 월급날 하루만 신나는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야 하는가. 나는 일도 열심히 하고 내 작업도 열심히 할 거다. 오랫동안 두 가지를 병행하다가 어느날 내가 골방에서 만들어놓은 많은 것들이 나에게 돈을 안겨주든, 보람이나 명예를 안겨주든, 충분한 정신적, 혹은 물질적 보상을 주는 날이 올 것이다.
welcome
2008/12/16
예술, 디자인, 그리고 비지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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